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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14:58
경제학에 “포획이론”(capture theory)이란 게 있다. 198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스티글러(G. Stigler)가 제안한 이론인데, 본래 규제하는 사람, 곧 규제자(regulator)가 피규제자를 포획해 뭔가를 강제하고 지시하는 게 정상인데, 현실에서는 반대로 피규제자가 규제자를 포획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켜 결국 공공의 이익은 달성되지 못하는 현상을 묘사하는 이론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좀 싱겁고 실망스럽다. 왜 그런가? 스티글러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아닌가? 다 아는 얘기라 싱겁다. 또 제도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선 거의 백년 전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 온 얘기 아닌가? 국가(규제자)가 (자본가에 포획되어) '자본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위원회'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너무 식상해서 제도경제학자와 케인스경제학들에 의해 일정 정도 비판을 받을 지경이니 말이다. 이런 식상한 얘기가 명색이 노벨경제학 수상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실망스럽지만, 그것이 주류경제학들에 의해 위대한 이론으로 칭송되는 걸 보면 어리둥절하다.
제도경제학자들과의 교류를 완전히 단절하였으니, 자신들에겐 진짜로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으니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지만, 아무튼 자신들의 불통과 무지 덕분에 그들은 식상한 주장에 대해 서로 상도 주고, 칭찬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주류계급과 언론이 주목하면서 하나의 ‘표준’ 이론으로 등극한다. 주류는 남의 것을 포함 하는 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주류의 권능이다.
요즘 많이 인용되는 ‘제4차 혁명’이란 용어도 그 사례에 해당한다. 특별한 실증과 이론적 근거도 없는 허접한 책인데도 주류에 속한 힘 있는 사람이 내뱉으니 모두가 인용하고 따른다. 내 글에서 수차례 인용한 적이 있지만 진화적 제도경제학자(특히 네오슘페터경제학자)들은 1980년대에 이미 ‘기술경제패러다임의 변화’라는 학술적 용어로 이 현상을 정리해 놓았다. 몇 차인지에 대해선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아무튼 그들은 산업혁명(제1차 기술경제패러다임) 이후 자본주의가 1990년대부터 ‘제5차 기술경제패러다임’에 진입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비주류처럼 힘없으면 공부결과도 빛을 못 보며, 탈취 당한다.
다시 스티글러의 ‘포획이론’으로 들어가자.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비주류경제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이론은 정말 싱겁다. 하지만 싱겁다고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가장 가까운 곳에 진리가 있듯이 싱거운 곳에 쓰디 쓴 외통수가 들어 있다. 무엇인가? 바로 포획이론의 ‘결론’과 그 ‘정책적 의미’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규제자는 예외없이 피규제자에게 포획되어 버린다. 그건 ‘법칙적’이다. 규제자도 피규제자와 같이 자기 이익에 충실한 행위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곧,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피규제자의 로비에 규제자는 반드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스티글러의 마음에는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선’은 기대되지 않는다. 주류경제학자에게 ‘사회’는 없고 개인만 존재하며, ‘공익’은 없고 사익만 추구되기 때문이다.
이제 스티글러의 경제정책이 도출된다, 굉장한 반전이 일어나니 조심해 봐야 한다. 뭔가? 모든 규제자(정부)는 피규제자에게 포획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규제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 괜한 짓 때려치고 정부의 개입을 풀어 시장, 노동, 복지 모든 곳에 규제를 완화하자! 암덩어리 규제를 단두대로! 싱거운 말 뒤에 이런 독한 비수가 숨어 있다! 노벨경제학상 받은 학자라고 아무 거나 가져다쓰면 안 된다. 아무튼, 주류경제학자들의 집안잔치인 노벨경제학상 받을만하지 않는가?
규제자가 피규제자에 의해 포획되듯이 학자도 기업과 정부관료에 의해 포획되어 ‘진실성’(integrity)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은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정부와 기업이 발주한 용역보고서 작성과정에서 가장 극명히 드러난다. 관료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지식인들이 영혼을 팔며, 로펌의 변호사처럼 돈과 지위를 약속 받고 어느 편에 서서 개처럼 싸워주고 있다. 그들에게 공익과 공공의 선, 곧 진실성(integrity)은 없다. 4대강계획서, 엘시티비리사건의 환경영향평가와 교통영향평가의 교수들, 재단의 주구가 되고 있는 사립대학교수들, 교수출신 정부의 수석과 장관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수는 ‘학자 게임’ 모형을 제시하였다. 이 게임에 설정된 암묵적 가정은 학자가 이기적이고 경제주의적인 존재라기보다 '정의롭고 부끄러워할 줄 하는 존재'다. 주류경제학자 스티글러의 인문학적 가정을 부정한 것이다.
토론자가 열띠게 토론하였다. 그런데 이런 근본적인 ‘가정’에 대해 아무도 논의하지 않고 겉만 장황하게 돈다. 토론 갈 때마다 느끼지만 토론자들이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 나는 학자들이 진실하지 못한 이유를 ‘제도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며, 그 대안을 ‘베블런의 경제학’으로부터 제시하였다.
“학자의 integrity를 높이는 방법을 금전적 동기(financial incentive)와 경쟁에 의존하는 주류경제학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그건 도덕적 실패를 다시 야기할 뿐이다. ‘프로젝트교수’일수록 공부하지 않고, 돈에 눈이 멀어 더 포획된다. 그것은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제도에는 ‘형식제도’와 ‘비형식제도’가 있다.
베블런은 인간의 경제활동이 비형식제도, 그러니까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학자다. 학자들이 진실하지 못한 이유는 진실이 패배하고 조롱당하는 문화 속에서 커왔기 때문이다. 대학원 석박사과정의 학문외적 잡무, 토론 없는 굴종의 문화, 지도교수의 불법을 묵인하며 4~5년을 견디면서 그들은 진실성은 패배한다는 것을 체득한다.
그리고 교수채용과정은 어떤가? 실력과 소신보다 학벌과 아부가 생존을 위해 적절하다는 것을 시간강사 생활 거의 10년동안 똑똑히 체화한다. 자, 이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한 ‘문화’를 생존의 원리로 받아들인 학자들이 교수로 임용되었을 때 integrity를 발휘할 수 있을까? 학자로 육성되는 과정에서 이미 ‘포획’을 체득해 버렸다. 그리고 그 문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미 육성된 결과를 제도적으로 통제하기보다 학자로 육성되는 ‘과정’에서 문화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 형식제도와 함께 비형식제도에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