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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 02:49
영화의 경호실장 곽상천(차지철)은 알려진 바와
달리 무식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50년대 중반 서울 용산고를 졸업하였는데 그 당시
용산고(용고)는 지금의 외고 보다 한끝 위였습니다.
경기 경복 용산 서울고 등 당시 5대 공립으로서 졸업생
대다수가 명문대, 육사 등을 진학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있는데다 무술실력도 상당하여
합기도 5단, 검도 3단의 실력을 갖추었읍니다.
(용산고가 일제시대 일본군인 자제들이 많이 다녀
검도를 필수 과목로 지정하여 재학생을 유단자로 만들고
육사진학도 상대적으로 많음)
그러나 아쉽게도 육사시험 (12기 기수 )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육사12기 엄청 어려웠다 합니다.
전국에서 공부 한다는 학생들이 많이 지원한게 사실이구요. 그들중 대다수가 한국 정치 경제 군을 장악합니다.
그후 그는 포병간부 시험을 보고 포병간부후보생
신분으로
군생활을 시작하고 59년 공수특전단에 배치받고
미국 포트배닝 보병학교 레인져 스쿨에 입교하였으며
인종차별땜에 덩치큰 미군을
합기도로 한방에 주어 패고 날려버렸습니다.
군사혁명때는 대위였다 혁명후 영관 장교로 바로 제대
하였습니다. 군에 있을때도 대학을 못나오고 육사에
대한 열등감이 무척 심하여 제대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 졸업과 한양대 석사 박사를 땃습니다. 그당시 고등학교 보다
웬만한 대학은 대학입학과 졸업이 무척 수월하였습니다.
석박사는 2년만에 돈으로...ㅎ
그는 혁명때 대위였다 바로 제대하여 말이 영관 장교
이지 김재규, 김형욱, 김계원 비서실장 등은 그를
대위 계급장 출신으로 아주 무시했습니다. 물론
육사출신 후배가 아니라 더욱 미덥지 않아 했구요.
김재규는 쓰리스타(삼성 군단장)출신 군인인데
밑에 한참 쫄다구였던
차지철이 마구 대들면서 열받아했구
차지철은 심리적으로 육사에 대한 열등감과 군 계급에
대한 자존감이 비극을 초래한 이유일 수도 있다는
분석입니다. 아뭏든 차지철은 무식한 발언과
행동으로 자멸했지만 그의 성정은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차분한 스타일이며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박통을 비롯하여
김재규 김형욱 이후락 등 중정부장들이 돈에 있어
부패했지만 돈 문제 만큼은 깨끗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국가와 상관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습니다만..
도가 지나치고 상관을 가려가며 복종했다는 점은
유감입니다.
*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 미술학과에
3번 지원했다 번번히 낙방하였습니다.
하사관 시험으로 군에 입문하여 그의 학력 컴플렉스가
2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라는 얘기도 있듯이
차지철이 재수하여 육사에 진학했다면 역사는
또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겠죠.
차지철 관련
부패 부분 -
차지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차지철이 청탁을 들은 척 안했다며, 차지철의 지인에 대한 청탁이 들어오자, 기도만 해주고 그냥 보냈다고 하나, 차지철의 금전문제가 깨끗했다는 측근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이렇게 차지철이 청렴했다는 주장은 경호실에서 차지철을 보좌했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소스인데,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차지철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민간 후처는 거기서 2천만 달러 짜리 저택을 소유하였다.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도 비슷하였다. 심지어 차지철 사망 직후에 차지철의 아내가 사기를 당했는데, 액수가 14억이었다. 당시 막 분양된 40여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약 3천만 원이었다. 14억 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그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금액이다.피아노 연주자였던 차지철의 후처가 이유없이 이를 소유했다면, 출처는 차지철 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청렴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거기다가 그렇게 사기당하고도 미국에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한 것을 보면, 더 많은 자금을 보유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위의 청탁에 관련된 일화도 차지철이 그 선배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 들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여자문제
개신교 신자로서 여성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깨끗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외도가 일반적이었고 정부를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차지철은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처와는 모종의 이유로 6개월 만에 이혼했다. 차지철 측의 주장으로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거나, 혹은 사생활 문제가 있었다고 하나, 이혼 사유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인할 방도는 없다.
차지철 부인 -
초선의원 시절 결혼한 첫번째 결혼은 얼마 되지 않아 이혼으로 끝났다. 차지철이나 그 측근들은 이 이혼이 여자의 복잡한 남성문제 및 시어머니 부양 거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 1990년대 유신특집을 기획하며 차지철 측근들을 인용해 기사를 낸 중앙일보는 이 여성의 고소에 걸려서 거액을 배상한 바 있다. 즉 법원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누가 차지철의 부인과 감히 바람을 피울까?
두번째 부인은 피아노 연주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둘째 부인 사이에서 차지철은 딸을 세명을 두었다. 이들은 차지철이 사망한 후 전두환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 돈은 차지철이 빼돌린 재산일 가능성이 많다. 그것도 모자라 국가유공자 가족 신청을 했으나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받았다.
참고하세요!!
즉 차지철은 돈에 깨끗하지 않습니다.
쓰신 글은 인터넷으로 흘러다니는 글로 저도 예전에
읽었고 이미 알고 있던 사항입니다. 위에 피아노
연주자니 미국 호화생활이니 말들이 많이 나돌았으나
그런말들이 당시 전두환이 권력장악을 위해
지어낸 말도
많이 있어 그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가는 점들이
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제글의 포인트는 상대적으로
생각 보다 아주 또라이는 아니라는 것과 또한
생각보다 털어보니 돈이 김재규나 박통 등보다 덜
나왔다는 것이라는 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한푼 가진 것 없어 후암동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었다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관점에서 그는 역사의 또라이였고
치부한 인물입니다. 쓴 글의 맥락과 포인트를 잘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탱크로 200만명 죽여라 한것으로 게임끝
차지철은 그냥 인간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