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탑 제휴업소】 | ||||||||||||||||||
오피 |
오피 |
안마/출장/기타 |
소프트룸 |
건마(서울外) |
키스방 |
휴게텔 |
하드코어 |
휴게텔 |
||||||||||
건마(서울外) |
소프트룸 |
건마(스파) |
건마(서울外) |
건마(스파) |
소프트룸 |
건마(서울) |
건마(서울外) |
핸플/립/페티쉬 |
2022.08.22 16:21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는 행위가 전혀 없었더라도 정말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TV 보면 맛집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걸 담당했던 PD 가 평하시정 근처의 감자탕집을 한번 취재하러 갔대요.
문득 그곳이 평화시장이니까 그 할머니께 물어봤다는 거죠
“혹시 전태일 아시나요?”
“잘 알지, 우리 진짜 단골이었는걸 ..”
그런데 여공들을 데리고 오면, 항상 자기는 안 먹고 여공들만 사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공짜로 줘도 안 먹더라는 겁니다.
다음에 혼자 왔을 때 이 할머니가 물어봤다는 거죠.
“내가 너한테 돈 받을까봐 안 먹었냐? 바보처럼 ….”
전태일 열사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전태일 : “아이들한테 먹었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안 먹었다는 게 탄로날까봐…
먹었다 그러고 안 먹고 있었다는 겁니다.
1910년 일제 강점 시작
1945년 해방
1948년 정부수립
1950년 625 남침
1953년 휴전............이때부터 태어난 사람들을 베이비 부머라고 부른다.
1953년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가 죽지않은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를 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과 625 전쟁으로 먹을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말이 해방이고 휴전이지 고향에 논밭떼기 없는 사람들은 먹을것이 없으니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세상이었죠.
1948년 광복후에도 개같은 정치인들 개판이나 쳣고 1950년 625가 터졌고 1953년 전쟁은 끝났지만
1961년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도 내내 개같은 정치인들은 개정치에 여념이 없었죠.
광복후의 한국은 농업도 힘든데 무슨 산업이 있었을꼬,
전태일은 48년생 해방둥이,,정말 없던 시절에 태어난건 맞아,
그런데 그 당시에 48년생, 58년 개띠, 63년 베이비부머 막차생까지 어지간히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었냐하면 고향에서 사는것 보다 서울에 와서 맨날 철야를 해도
그래도 쌀밥을 먹고 몇천원(48년생)에서 몇만원(60년생대 기준)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이었다.
고향산천에서 쌔가 빠지게 일을해도 보리밥도 제대로 먹는것조차 해결할수 없던 상황이 쌀밥에 고깃국도 먹을 수 있고
월급까지 모을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행복하고 돈을 모아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이 열렸던 것인가.
지금 기준에서 여공이 천한 직업이고 공장에 다니는것이 힘든 것이지 그때 기준은 서울가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여공이고 공원이었다.
박정희가 우직하게 경제발전에 힘을 쓴 결과 1961년대 후에 태어난 이들은 그래도 많은 덕을 보았다고도 볼수 있다.
1960년대에는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많은 공장(그래봐야 보세공장이 주류)이 만들어지고 경제에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전태일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 다 고생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그 전에 30년대 4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더 힘들었어,
고려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더 힘들었고,
전태일이만 힘든게 아니었다는 얘기야, 지금은 70%가 상급학교 진학이지만 그때는 90%가 초등학교도 못나오고 공장 찾아서 서울로 갔어,
그 시대에 10~20% 논밭데기 있는 양반들 후손들 말고는 다 그랬어,
시골에서 더 힘들게 살다가 도시에 와서 하는 공돌이 생활, 지금 현대자동차 들어간 거 만큼 즐거운 일이었어,
그래요, 저도 40년대생은 아니니 45년 48년 좀 헷갈리긴 해요, 전태일이 48년생이니 해방둥이는 아니네요,
그러나 45년과 48년 아무런 차이도 없는 암울한 때인건 확실하지 않나요,
공돌이 얘기도 출생지에 따라 차이는 있지요.
그나마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진학율도 높았고, 진학률이 높으니 중졸이나 고졸만 해도 그래도 일요일에 쉬어주고, 그런 저런 혜택이 있는 좀 나은 전자회사 같은데 다닐수 있었으니 공돌이가 우스웠겠지만 그당시 한국사회의 도시가 아닌 농촌이나 산간벽지나 섬 같은데서 살다가 국민학교나 나오는둥 마는둥 하고 나왔던 사람들 한테는 공돌이 생활 자체도 꿈같은 직장이었다는 얘기죠. 그 당시 평화시장은 내수용 의류 생산을 맡는 국내의 우수한 직장군이었습니다. 객공이라는 제도로 일하는 만큼 실적주의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고, 미싱이나 재단의 숙련공들은 꽤 많은 월급을 받기도 했지요, 오히려 규모가 큰 전자회사 같은데가 기숙사 완비라든가 근로조건이 다소 좋다는 이유로 초봉을 견습공 수준으로 장기간 주다보니 오히려 봉제공장에서 시다를 조기에 마치고 미싱이나 재단의 숙련공으로 보다 빨리 올라가서 월급을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시골출신들에게 평화시장은 번영과 기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같은 연배의 친구들 중 도시에서 태어난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이 너는 왜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이렇게 살았냐 이죠,
경기도나 대구 같은데서 태어났으면 도서나 산간보다 5년내지 10년은 문명이 앞섰고 도시에서는 중등학교 진학률도 높았는데 왜 나하고 상황이 비슷하냔 말이죠.
도서산간이나 낙도에서는 일을 해도 수확이 훨씬 떨어지고 일자리 자체도 없고,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으니 중학교 진학은 도시로 유학가는거 만큼이 어렸운 일이었으니 사람새끼는 모두 서울로 서울로 나왔던 거예요.
노동운동도 일단 배가 불러야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배가 고파서 굶어 죽을 지경이면 노동운동 할 수 있을까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미군도 물러나서 무정부 상태처럼 가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같은데서 노동운동을 한다면 그게 맞는것일까요. 배부르고 한심한 인간들이란 얘기 밖에 안나오죠.
전태일이 스무살 쯤 되던해인 1968년 이라해도, 1961년 박정희가 들어서고 1965년에 월남 파병으로 돈벌고, 일본한테 피해배상금 받아서 경제개발 기반 삼고 하던 시기라서 박정희의 경제건설의 효과도 별로 크게 두드러진 결과가 나오기도 힘든 시기라고 보여요. 그런 시국에 노동운동을 한다며 왜 최후까지 맞았는지는 잘 몰라도 살아 남아서 싸우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전태일이 아버지가 재단사 출신으로 봉제공장 사장까지 했다고 하는것 같네요, 그러면 전태일이 아버지도 가진자 였으니 엄청난 횡포를 부렸을까요,
사람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기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온 대학생 한테 구내식당의 밥은 엄청나게 맛있는 밥이지만
도시에서 먹고 자란 사람한테는 구내식당 밥은 맛 없는 형편없는 음식인 거죠.
유럽에서는 증기기관차가 만들어 지고 동력을 만들어서 산업혁명이 일어날때에 조선에서는 영조가 그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는 수원성으로 마차타고 행차나 다니고 있었죠. 산업혁명이 조선보다 대략 200년이나 앞선 유럽의 노동자 문화와 한국의 그것을 비교하는것은 좀 그렇죠. 산업화 문명이 들어오기도 전에 외세의 침략과 김일성의 망동으로 쫄쫄 빨려버린 빈 껍데기인 대한민국이 과연 노동운동이 그렇게 잘 뿌리내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현기차 노동자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평생 페인트나 분진 들이키면서 쇳조각이나 조립하고 연봉 7천에서 억대 받은들 세금떼고, 생활비 쓰고 다람쥐처럼 열심히 쳇바퀴는 돌지만 그렇게 해서 얼마나 만족하는 인생일지,
안정된 직장? 노조의 비호하에 고리타분하고 무미건조한 직장이죠.
과거 직장이 제한적일때에는 좋은 직장이었을지 몰라도 g10 들먹이는 지금은 그저 개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기계조립용 로봇같은 생활의 연속 아닌지.
일제 강점과 625 전쟁, 그 암울한 시기에 자살과 같은 극단적 행동으로 맞서는 것이 과연 옳았는지, 자기들 보다도 더 힘들고 고달프지만 지금까지 꿋꿋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더 열심히 살아서 세상을 버꿔볼 생각을 왜 안했는지 의문이 들어요.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자살한다면 인류는 멸망했겠죠.
지금도 재개발 재건축하면서 도시의 외곽으로 쫒겨나는 사람들 많고, 직장내 폭행, 성폭행, 왕따 만연하고, 노조에 반대하는 사람 절대 두고보지 않는 노조갑질 판치는 세상이죠.
항간에 불을 붙여준 자가 누구냐 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게 오리무중 이거든요
그리고 재단사로 수입이 꽤 됬습니다 그를 의식화시키고 자살로 내몬 사람들이
누굴까요? 자신의 일신상의 일로 죽은게
아닙니다 운동권의 방식으로 죽은거죠
죽음을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의기도 높이 칩니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가 않아요 전태열의 오롯이 자신만의 생각에
의한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기에는 당시 봉제공장 이라는 곳이 당시 시대상으로 그렇게 노동력을 편취하던 곳이 아니고 학대하던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열사 좋은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