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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3 08:35
1. 소수림왕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를 배운 왕이면 무조건 이름은 들어봤을 수 밖에 없는 유명한 군주.
부왕인 고국원왕 치세 때 전연에 깨지고 백제한텐 고국원왕 본인의 목숨까지 잃으면서 멸망 직전까지 몰린 고구려를 중흥시킨 명군.
율령 반포, 태학 설립, 불교 공인 등 각종 내정에서의 성과를 통해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라의 국력을 이전보다 더욱 끌어올림. 사실 제대로 된 기록이 부재해서 그렇지 소수림왕의 치세 전후를 보면 내정한정으로는 한국사 통틀어서 열손가락 안에 들만한 인물.
2. 고국양왕
내정의 명군 형 소수림왕과 한국사 최강의 외정깡패인 아들 광개토대왕 사이의 인물로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연함.
내부로는 고구려의 종묘와 사직을 수리하는 한편 외부로는 요동에서 후연과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기도 함. 광개토대왕 시기의 정복전쟁의 전초전이라고 볼 수도 있음. 당시 요동을 일시적으로 차지했을 때 포로 1만명을 데려오기도 하는 등
소수림왕과 더불어 광개토대왕 대의 정복전쟁의 기반을 마련해준 왕.
3. 광개토대왕
한국사를 포기한 학생들이라도 세종대왕과 더불어 이름은 들어볼 수 밖에 없는 한국사 최강의 정복군주.
업적은 다들 알테니 최대한 간략하게 말해보자면 북방의 비려 숙신을 개패고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이후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5만 군대로 개박살을 내버림.
이후 후연과의 전쟁을 통해 사실상 후연을 멸망시켜 버림. 후연이 북연으로 교체되고 고구려 출신 고운이 그 북연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자 ‘종족의 예’를 베푸는데 학자들 중 일부는 이 종족의 예를 사실상의 속국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음.
그리고 동부여를 항복시키며 마무리.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떠오르며 체급 자체가 바뀌어 버림.
4. 장수왕
부왕이 만들어놓은 큰 체급의 고구려를 제대로 관리한 명군.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하자 북연의 황제 풍홍을 데려오고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약탈하기도 함.
평양으로 천도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는데 정황 상 이 과정에서 일련의 대숙청이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주된 의견.
이후 다들 알다시피 대대적인 남진정책을 통해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한성을 불태웠으며 신라는 수도 근처까지 접근하는 등 나제동맹을 한 상태였음에도 남방전선에서 꾸준히 우세를 점함.
북방으로는 지두우 분할시도도 하긴 하는데 이는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결과는 알기 힘듦. 다만 이 부근에 고구려가 영향력을 끼쳤다 정도는 확실시되는 편.
중국과는 적절한 외교로 북위에게는 남조국가 다음으로 대접받고 심지어 동등하게 대우받은 적도 있음. 실제로 장수왕 시기 북위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서방전선의 병력까지 끌어올려다가 무산되기도 하는데
이것으로 추정 가능한 것은 장수왕 대의 고구려는 이제 지방태수 선에서 마무리되었던 이전과는 달리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 정도의 국가가 전 국력을 끌어온다 해도 결과를 장담하기 힘든 국력을 갖추게 됨.
5. 문자명왕
위의 명군라인업에 비하면 좀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국왕.
즉위 초 물길에 의해 북부여가 멸망하자 그 유민을 받아들이며 세력권을 조금이나마 확장시킨 것으로 추정되긴 하지만 이마저도 정확하진 않고
남진정책은 소소한 성과도 몇번 있었으나 나제동맹에 좀 격퇴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게 됨. 백제가 어느정도 중흥되었으며 신라도 강해진 때문이기도 함.
6. 안장왕
고구려의 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명군
문자명왕 시기에 주춤한 고구려는 안장왕 대에 다시금 강한 모습을 보여줌. 북위를 공격하여 용성 부근을 약탈하는 한편 남쪽의 백제와 거듭된 전쟁에서 번번이 승리를 거둠. 이 과정에서 문자명왕 때 일시적으로 빼앗긴 한강유역을 다시 확보했다는 설도 있음.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록때문에 시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함. 그리고 실제로 안장왕 사후 고구려는 상당히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이며 안원왕때는 나제동맹에 쩔쩔 매고 양원왕때는 아예 남방영토 대부분을 상실하며 이전의 위상에서 좀 떨어진 모습을 보이게 됨.
전성기를 보낸 다른 군주들에 비해 비교적 기록이 적게 남은 임금이지만, 그 행적만을 보더라도 고구려 전성기의 끝을 장식한 명군이라 부를 만하다. 기록이 적어 그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당대에 고구려는 문자명왕 말기부터 시작된 국력의 쇠퇴가 외부로 드러나고 있었다.
문자명왕 말엽부터 무령왕의 웅진 백제와 여러 번 전투를 벌였지만 승리를 거둔 전투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 특히 한강 유역을 빼앗겨 고구려-백제 전선이 임진강-예성강 일대로 밀렸다 는 사료들도 있을만큼 공세에서 수세로 변화되어 있었던, 어떻게 보면 고구려 입장에서 충분히 위기라고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또한 주변국의 통제력 역시 잃어버리면서 북방 영토까지 줄어들던 대외적 위기까지 가세한 건 덤. 이 증거로, 중국의 양나라가 서기 520년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 백제 무령왕을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하여 백제왕을 고구려왕보다 더 높게 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에서 백제왕을 고구려왕보다 높은 등급으로 친 사례는 안장왕-무령왕 사례가 유일하다. 그 정도로 안장왕 재위 초기까지의 고구려는 백제의 파상공세에 점점 밀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장왕은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력을 재정비한 후 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끝에 연거푸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들을 다시 한강 이남 지역으로 몰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또 옛 후연의 수도이기도 했던 북위의 용성을 공격해 약탈하는 등 주변국과의 정세를 공세로 전환시켜 전성기의 국력을 지켜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안정적인 남북조간 양팔 외교를 통해 고구려의 대외적 위상까지 유지시킨 건 덤. 이렇게 안장왕이 회복시킨 국력은 안원왕 말엽까지 이어졌다.
다만 이 시기에 고구려의 중앙 조정이 점차 분열되면서 왕권이 조금씩이나마 흔들리고 있던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 또한 이 의문에 신빙성을 더하는 부분. 그러나 이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시기를 다룬 한중 역사서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일본서기》만의 내용인데다 본격적인 쇠퇴기의 시작은 안장왕이 승하한 지 몇 십년 후인 안원왕 말엽부터인지라 확실하다 단정짓기도 무리라는 것이 크나큰 약점이다.
어쨌든 이 《일본서기》 기록을 따르면 안장왕의 승하 이후 집권한 안원왕 말기에 들어 고구려는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나 그야말로 나라가 두 동강나는 지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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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수림왕~안장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명군 라인업 160년동안 고구려는 당장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국가에서 동북아에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한 강대국이자 장수왕 이후로는 동아시아의 4대 강국으로 탈바꿈함. 위상 한정으로는 현재의 한국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으며 시각에 따라 그 이상으로 볼 수도 있긴 함.
비록 안원왕 양원왕 시기의 쇠퇴를 겪긴 했지만 저 시기 쌓아놓은 국력과 평원왕 영양왕이라는 중흥군주들 덕에 이후에도 통일제국과의 70년전쟁을 치루기도 하는 등 멸망 시점까지도 강대국 포스를 보여줌.
[개인적인 의견]
수/당 상대로 70년 넘게 버티고도 결국 국력이 딸려서가 아니라 내부분열로 무너진 나라
수/당 뿐만 아니라 남쪽에 신라까지 막아야 되는 상황에서도 당나라 대규모 침략을 두 번이나 버틴 나라
그렇게 망하고도 결국 발해로 부흥운동 성공하고(이것도 여진/말갈족이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거임), 심지어 발해부흥운동도 금나라 건국때까지 이어짐
어릴땐 그냥 살수대첩, 안시성 전투, 을지문덕 양만춘 짱짱 이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놀라운 나라임
심지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2차 고당전쟁때는 대규모 회전에서 당나라 주력군 박살냄
연개소문도 고구려 멸망이랑 너무 가깝고 쿠데타 주동자라 저평가 되는데, 군사적 재능은 솔직히 한반도 역사 Top5에 들어간다고 생각함
그래도 성의있게는 썻네